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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축성비 (嶺營築城碑)
종별 및 지정번호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소 재 지 : 수성구 만촌동 산 90(영남제일관 광장)
이 비(碑)는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영조 13)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공사기간은 1736년 1월부터 시작하여 6개월 정도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은 78,534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女堞)이 819첩, 성높이는 서남이 18척, 남북이 17척, 뒤 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 때 비로소 돌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한다.
이 비는 원래 남문(嶺南第一關)밖에 세웠는데 1906년(광무 10) 당시 대구군수인 박중양(朴重陽)이 성을 헐어 버렸고, 이 비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다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白常輝)가 썼다.
대구부 수성비 (大邱府 修城碑)
대구부 수성비
종별 및 지정번호 :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
소재지 : 수성구 만촌동 산90(영남제일관 광장)
이 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1870년(고종 7)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 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城壁)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樓閣)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각의 이름은 동을 정해루(定海樓), 서를 주승루(籌勝樓), 남을 선은루(宣恩樓), 북을 망경루(望京樓)라 하였다고 한다.
이 비는 본디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06년(광무 10)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한곳에 자리잡지 못하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런 뒤 1980년 남문[嶺南第一關]을 다시 세우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썼다.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
종별 및 지정번호 : 시도유형문화재 23-00-00-22
지정일 : 1988.05.30
소재지 : 수성구 상동 182번지 이서공원내
규 모 : 건물(비각1칸 9.72㎡), 비석3기(이공제비2, 이후범선영세불망비1기)
이공제비는 이서¹ 선생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대구 주민들이 세운 송덕비(頌德碑)²이다. 대구분지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하는 신천은 홍수때만 되면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1776년(조선 정조 원년) 이서가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주민의 피해를 염려해 정조2년(1778년) 주민 부담없이 사재를 털어 10여리에 걸쳐 제방을 축조하여 홍수의 피해를 막았다. 이에 주민들은 이판관이 쌓은 제방을 중국 송나라의 명학이던 소식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축조한 제방을 “소공제”라고 명명한 것을 본떠서 “이후언(李侯堰) 또는 이공제(李公堤)”라 칭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이공제비를 세우고 매년 1월 14일에 향사를 올렸다. 중앙의 비는 1986년 신천대로 공사 때 수성교 서편 지하에서 발견된 것으로 1808년(순조 8)에 세운 것으로, 1797년 세운 비가 초라해 이서 선생의 업적을 영구히 기리고자 다시 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다. 이공제비와 나란히 오른쪽에 서 있는 군수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1899년에 세운 것으로 1898년(광무2)에 큰 홍수가 있어 이공제 하류 부분이 훼손되어 대구 읍성이 위험하게 되자, 군수 이범선(李範善)이 주민 부담없이 국고로 수천금의 비용을 들여 단시일에 공사를 완공하자 주민들은 그의 공적을 보답하고자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들은 지방수령으로 재직 당시 치수에 힘쓴 업적을 기려 백성들이 세웠다. 이 비석들은 중구 대봉동 655번지 신천대로변에 있었으나 주변 수목으로 인해 시계(視界)가 불량하여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주변 공간이 협소하여 2000.9.6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코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주(註)
1) 이서 : 1732~179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호(季浩). 1759년(영조35년) 문음(門蔭)으로 입사하여 1776년부터 2년6개월 동안 대구 판관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가장 큰 업적은 신천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제방을 축조하여 막은 치수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2) 송덕비(頌德碑) : 관직에 있으면서 은혜와 교화를 끼쳤을때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여 만 드는 비(碑). 일명 선정비(善政碑), 유애비(遺愛碑)라고도 한다.
자료협조 : 대구광역시 수성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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